3. 유교법회의 불교사적 의의유교법회는 식민지 불교로 대표되는 한국 근대 불교사에 적지 않은 발자취를 남겼다.첫째,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였다.한국불교는 조선 왕조 500년 동안 탄압과 소외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암울한 사정은 일제강점기에 더욱 심해져 한국불교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던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이 일본불교화 되면서 왜곡뿐만 아니라 그 뿌리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임제종운동 → 선학원 설립 → 조선불교선종 /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 → 유교법회’로 면면히 계승된 민족불교 회복운동은
행실이 바르지 못할 때의 손해〔不操行의 害〕848. 사람이 재물과 여색(女色)을 버리지 않으면 비유컨대 칼날에 묻어있는 꿀은 (그 꿀은) 한번 먹을 것으로도 부족하지만 어린아이가 핥으면 혀가 베일 수 있는 우환이 있음과 같으니라. -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849. 명예와 이익의 경계(境界)를 탐하며 여인을 가까이하는 버릇을 갖게 되면 그는 승려라고도 속인이라고도 할 수 없는〔非僧非俗〕 불법(佛法)을 해치는 적(賊)이니라. - 《제법집요경(諸法集要經)》850. 남의 아내를 강간하면 죽어 쇠가시 지옥〔鐵刺獄〕1)에 떨어지느니라. -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모든 몽골 풍속을 금지하고 당·송 시대의 중화 전통과 관습을 부활시켰다. 성리학 규범을 규율로 정해 국시로 삼는 한편, 각지에 서원을 세우는 정책을 펼쳤다. 그렇게 성리학적 토대를 세우면서도 불교에 대해서는 배척하지 않았다. 10대 시절 승려 생활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조가 이어지면서 주원장 사후 명나라는 조선에 불교와 관련된 것을 요구하는 일이 있었다. 태종 때 사리를 요구한 일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태종 7년(1407) 5월 14일 중국에서 사리를 요구하는 사신이 온다는 말을 듣고 신하를 전
“민족 유산을 새롭게 보다”평화통일의 길은 사람끼리 왕래가 먼저다. 여기에 분단 이전의 역사와 옛사람의 체취가 담긴 유적과 유물, 유적을 노래한 시편은 양념과 고명(糕銘)과도 같다. 서먹서먹한 첫 만남이나 중단한 교류 테이블에서 인사말로 할 수 있는 소재가 필요하다. 서로 공감하고 있는 민족 유산은 남북 교류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소재이다.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2014년 10월 발표한 이른바 고전적 로작(저서)에서 “민족유산 보호사업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빛내이는 애국사업”이라 했다. ‘로작’은 힘들여
당시 법회에서는 대승계를 강설한 것 외에도 우리나라 조계종의 종지를 설하기도 하였다.세존께옵서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을 드시니 가섭존자(迦葉尊者)께서 미소지음으로부터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신 조조상승(祖祖相承)의 정법(正法)이 이로부터 비롯되어 33조사로 내지 역대전등(歷代傳燈)이 서로서로 계승하여 오늘의 법회를 이루었습니다. 삼가 생각하오니 세존이 아니시면 염화(拈花)가 염화(拈花) 아니시며 가섭(迦葉)이 아니시면 미소(微笑)가 미소(微笑) 아니십니다. 염화(拈花)와 미소(微笑)가 아니면 정법(正法)이 아닙니다. 정법이 없는
845. 우타연왕(優陀延王)이 부처님에게 아뢰었다. “제가 여인(女人)1)의 말에 속아 세존을 해치고자 하였으니, 제가 여인이 큰 독〔大毒〕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바라건대, 여인의 큰 독을 없애주소서.”부처님이 왕에게 말씀하시었다. “왕이여! 여인의 죄를 묻고자 하면 먼저 장부(丈夫)의 죄를 물어야 합니다. 남자에게 네 가지 잘못이 있기에 여인에게 속게 됩니다. 첫째, 탐욕으로 멋대로 하기 때문에 사문(沙門)을 가까이하여 청정한 계를 받아 복업(福業)을 닦을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의 가르침을 받은 이도 믿음이 깊지 못하면 사악
조선시대 중국 사신의 과도한 요구로 왕실이 불편할 때가 많았다. 태종 때 명나라 사신으로 빈번하게 온 자가 황엄(黃儼)이다. 태종 3년 4월 8일 명나라 황제의 고명·인장·칙서를 가지고 온 사신이었으니 조선 왕조로서는 귀한 손님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위치에 있음을 알고 황엄은 중국 황실의 요구와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조선 왕실을 번거롭게 하였다. 4월 10일 황엄을 비롯한 중국 사신을 위해 임금이 태평관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데 황엄(黃儼) 등의 행동거지가 무례하므로, 임금이 뜻에 맞지 아니하여 잔치를 재촉해 파할 정도
“만해 선사를 다시 부르다”북측은 역대 고승에 대해 혁명성·투쟁성·사상성을 통해 평가한다. 휴정·유정·처영 대사의 투쟁과 사상성을 높이 평가하고, 묘향산 보현사 수충사에 진영을 모시고 추모한다. 근세기 고승 중에는 만해 한용운 선사를 높이 평가했다.김일성은 육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8권에서 “불교인들 가운데 한용운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3·1 인민봉기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나섰던 사람입니다. 그는 불교 승(僧)이었는데, 조선 독립은 청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족 스스로의 결사적인 행동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주
2. 유교법회의 개최당시 유교법회를 준비하고 개최했던 중심 인물들은 선학원을 중심으로 설립부터 오랫동안 활동했던 수좌(首座) 스님이었다. 그들은 이미 조동종 맹약에 반대해 임제종운동을 전개했고, 그 이념을 1921년 선학원 창설로 이어갔으며, 우여곡절을 견디고 마침내 1934년 재단법인을 인가받아 선학원이 법적인 보호를 받게 만드는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다.청담 스님과 운허 스님은 고승법회 개최를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화계사, 봉선사 등에 법회 개최를 신청했지만 거절당하자, 종로경찰서와 상의하여 선학원에서 법회를 할 수 있다는
844. 아난이 걸식하며 물가를 따라 걷다가 한 여인이 물가에서 물을 길어 가는 것을 보고 아난이 그녀에게 물을 청하였다. 그녀가 곧 물을 나누어 주고는 아난을 뒤따라가서 아난이 머무는 곳을 보고는 집으로 돌아가 그녀의 어머니 마등에게 말하였다.“어머니! 나를 시집보내고자 하거든 다른 사람에게 보내지 마소서! 내가 물가에서 한 사문을 보았는데 이름이 아난입니다. 나는 아난이라면 시집가고 아난이 아니면 시집가지 않으렵니다.”어머니가 아난을 곧 찾아가니 그가 부처님 제자임을 알고 돌아와 딸에게 말하였다. “아난은 불도를 섬기는지라 너를
태종의 즉위와 불교 배척의 조짐태종은 배불의 군주였다. 즉위한 후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많이 실시하였다. 다만 이성계가 태상왕(太上王)으로 있는 까닭에 배불의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사실이 태종 1년 윤3월 23일 경연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헌부(憲府)에서 오교(五敎)·양종(兩宗) 가운데 명리를 쫓는 승려를 파하고, 사사(寺社)의 토전(土田)은 모두 공가(公家)에 붙인 후 산문(山門)은 오직 도승(道僧)에게 맡겨두기를 청”하였다. 이에 태종은 “나도 그 제안을 따르려고 하나 태상왕께서 불사를 좋아하
“평양 진출을 논하다”평양은 갈 수 없는 미지의 도시였다. 남북한 불교계는 전쟁과 분단 후 60년 만에 처음으로 평양 진출을 모색했다. 2013년 8월 중국 심양에서 열린 남북불교 실무회의를 통해 ‘평양불교회관’ 건립사업을 구체화했다. 이 시기에 중점 사안으로 제의된 남북불교 협력사업과 교류 부문에 대해 알아본다.평양의 역사적 파노라마평양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도시를 처음 건설해 주목받은 곳이다. 평평한 땅, 벌판의 땅이라는 뜻으로 ‘부루나’ 또는 ‘바라나’라고 불린 평양(平壤)은 ‘부루나’의 이두식 표기다. 다른 별칭은 ‘버드나무
유교법회는 일제강점기 왜색불교에 대한 한국불교의 저항이었고,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자리였다. 청정 비구승을 중심으로 한 불교도들의 민족불교 실현을 위한 의지를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해방 이후 한국불교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지대하다.1. 유교법회의 배경1941년 3월은 일본이 전쟁 준비를 한창 서두르고 있었던 시점이다. 한국은 일제 말기를 맞이하였으며, 일제는 이 시기에 최후의 발악으로 창씨개명, 국어 및 국사 교육금지, 강제 징용 및 징병, 위안부 및 정신대 징집 등으로 다양한 식민지 정책을 전개
제3절 품행〔操行〕품행은 반드시 신중하게〔操行必愼〕837. 품행이 바른 사람〔操行人〕은 뜻과 행동〔志行〕을 굳건히 지니어 불도(佛道)를 버리지 아니하느니라. - 《화엄경(華嚴經)》838. 그때 한 비구가 있는데 이름이 무구광(無垢光)이다. 비사리성(毘舍離城)에 들어가 차례로 걸식하다 뜻하지 않게 창녀의 집〔婬女家〕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때 창녀가 무구광을 보고 오염된 마음을 일으켜 문을 곧 걸어 잠그고 비구에게 말하였다. “존자(尊者)와 함께 욕망의 일을 함께 행하고자 하니 만약 나를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요
조선의 2대 임금인 정종은 1398년 8월 26일 일어난 ‘왕자의 난’으로 폐위된 이복동생 의안대군의 뒤를 이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9월 5일 태조의 선위(禪位)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왕위에 관심이 없던 정종은 ‘제2차 왕자의 난’ 이후 1400년 11월 13일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2년 남짓 재위 기간에 보여준 그의 불교 신행은 흥불(興佛)도 배불(排佛)도 아닌 모습이었다.정종의 불교에 대한 인식정종은 신하들과 불교에 대해 여러 번 토론하였다. 2년 1월 10일 경연에서 한나라의 삼로(三老)·오경(五更)의 일을 물었다.
선리참구원은 또한 “비구니(比丘尼)와 부인(婦人)은 여선실(女禪室)이 별(別)로히 설치된 선원에 한하야 방부(榜附)를 허(許)하기로 하자”는83) 적음 스님의 건의를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김적음은 1931년부터 이미 대중들에게 설법·강화(講話) 등의 행사와 남녀선우회(男女禪友會)와 부인선우회를 조직하여 선풍진작과 대중화에 진력하였다. 남녀선우회는 회원이 70여 명이나 되었다. 부인선우회 역시 1931년 3월 21일 총회가 개최되어 한용운이 설법하기도 하였다.84) 특히 부인선우회(婦人禪友會)는 단순히 복을 비는 기복신앙(祈福信仰)
832. 옛날에 국왕이 나라를 버리고 사문(沙門)1)이 되어 산속 정사(精舍)2)에 띠집을 만들고 쑥으로 앉을 자리를 만들어 스스로 일컬어 “뜻한 대로 되었다〔得志〕” 하고 크게 웃으며 “즐겁다〔快〕”라고 말하였다. 이웃 사람이 물었다. “그대가 즐겁다〔快樂〕고 하는데 지금 산중에 혼자 앉아 도를 배우고 있거늘 무슨 즐거움〔快樂〕이 있다는 것인가?” 사문이 말하였다. “내가 왕을 할 적에는 근심이 많아 혹시 이웃 왕이 내 나라를 뺏을까 두려워하였고 남이 나의 재물을 뺏을까 두려워하였으며 혹시 내가 다른 사람의 탐욕과 이익의 제물이
조선이 건국되면서 관리들은 고려조에서 행해졌던 불교 상례(常例)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태조 1년 8월 2일 도당(都堂)에서 대장도감(大藏都監)의 폐지를 청하였다. 이 기관은 몽골 침략 때 재조대장경 조성을 위해 설치되었다. 그 후 대장경을 조성한 예는 없으나 폐지되지 않고 조선 때까지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8월 5일에는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燃燈會)를 폐지하기를 청하였다. 두 불교 의례는 태조 왕건 이후 고려의 국가적 행사였으나 배척의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8월 11일 예조전서(禮曹典書) 조박(趙璞) 등이 봄, 가을에 장경
“북녘 가람에 연등 달다”개경에서 시작된 연등회(燃燈會)는 삼국시대에 전래한 불교를 국가이념으로 정한 태조 왕건이 943년에 명령한 ‘훈요십조’를 근거로 둔 고려 왕조의 정책적 연례행사였다. 정월보름(도교 명칭의 上元)에 행하던 상원연등회는 1010년 현종 즉위년에 부활돼 날짜를 이월보름으로 변경했다. 민간에서 머슴 쉬는 날인 이월초하루와 붓다의 열반절인 이월보름에 관한 두 의미를 묘하게 합친 이월보름 연등회는 몇 차례 정월대보름과 교체·중복되었지만 지속했다.고려 연등회는 《고려사》에 보면, 14일 소회(小會)에는 궁궐 편전의식과
한편 백용성을 위시한 비구승들은 “승(僧)된 자의 지계수도(持戒修道)함은 당연한 본분사인데 어찌 사법(寺法)을 개정하여 대처자로서 주지되기를 당국에 희망하리오……”라는 내용으로 ‘파계생활 금지’에 관한 건백서를 제출하였다.71)현금現今 조선의 승려는 처대식육을 감행하여 청정사원을 오염시키고 더럽히는 마굴로 만들어 운영하고 있으니 승체僧體를 바로 보면 실로 통탄할 뿐입니다. 부처님이 승려에게 처대妻帶할 것을 허락했다면 재가이부중在家二部衆을 둘 필요가 없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바라옵건대 각하는 승규僧規를 명찰明察하여 출가자의